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건강과 행복을 축복하기 위하여 정한 날입니다. 유래는 1856년에 미국의 한 목사가 6월 둘째 일요일을 어린이 날로 정한 후 미국등 각지역에 퍼졌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통치하에 있던 1922년에 어린이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기위하여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한 후 1939년에 일제에 의하여 중단되었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6년에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버린 우리들은 어린시절의 고향을 걷고 싶다던 어느분의 고향인 월야면을 걸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광천동 터미널에서 함평군내 버스를 타고 함평군 월야면 백야 정류에서 하차하여 일행들과 합류하여 아주평범한 월야 들녘을 돌아 보았습니다.
백야 버스 정류소에서 일행들과 합류하였습니다.
.등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꽃말은 '결속, 사랑에 취하다' 입니다. 꽃말처럼 빽빽히 결속되어 한여름의 뙤약볕에서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로 쉼터에 많이 심는 나무입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에 꽃이 핍니다.
시골길에서 뛰어 놀던 골목대장과 어린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축 축사로 사용하였을 건물이 버려졌습니다.
나즈막한 월악산(150m) 정상에 올라보았습니다. 월악산은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 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월악산성이 정상부를 둘러 싸고 있다.
월악산 정상 삼각점
월악산은 장성 삼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주의에 완만한 구릉들이 펼쳐저 있어 사방이 잘조망된다. 이 때문에 방어를 하는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월악산성은 축성연대나 폐성연대, 그리고 산성의 규모등에 관해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주변의 고분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조 된 것으로 보인다.
시멘트 길이지만 참 아름다운 길입니다.
[팔열정부각]
이 정각은 여덟 명의 열부를 배향한 곳이랍니다. 이 열부들은 정유재란 당시 부군들이 왜군들의 흉탄에 맞아
영광 삼서현 장성 삼서에서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영광 칠산 앞바다까지 피난하던 중 왜군의 추격을 받
고 투신자살함으로써 정설을 지킨 아낙들입니다. 여덟 열부들을 기리키 위해 이곳에 정각을 세웠고 순절
지인 묵방포에는 순절비를 세웠답니다.
정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익공계 건축이며 사면은 벽체 없이 홍살로 둘러 있다. 여덟 열
부는 정함일의 부인 이씨, 정경득의 부인 박씨, 정희득의 부인 이씨, 정함일의 딸(처녀)정씨, 정운길의 부인
오씨, 정주일의 부인 이씨, 정절의 부인 김씨, 정호인의 부인 이씨등입니다.
[남산뫼 학살희생자 무연고묘역]
1950년 12월 7일(음력 10월 27일) 아침,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지변,내동,성주마을)와 월야리(동산,괴정
송계,순순촌마을)앞 남산뫼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중대장 지시하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작전 준비를
끝낸 이들은 그 자리에 매복한 채 중대장의 수신호만 기다렸다.
그 시각 월악리와 월야리 주민들은 뭔가에 홀린 듯 새벽에 잠이 깼다. 전날 군인들이 인근 정산리에서 70여 명
의 주민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뒤 숭숭한 탓에 잠을 설쳤다. 몇몇 젊은이 들은 험한 꼴을 피하고자
서둘러 동네를 벗어나 몸을 숨기기도 했다.
정산뿐만 아니라 계림리에서도 60여 명의 무고한 이들이 무자비하게 학살을 당한 터라 이곳만은 군인들의 발길이
닫지 않길 바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작전은 토끼몰이식으로 시작됐다. 어슴푸레 비췄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7개 마을을 둘러싼 군인들이 집집
마다 뒤지며 사람들을 끌어냈다. 빨치산이 파손한 도로를 복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안심시키면서, 나오지 않다가
발각되면 총살시키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끌어낸 사람들은 팔열정부각으로 이동했다.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몇몇 분의 말에
의하면 대략 80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시 팔열각 옆 논에 집결한 뒤 다시 남산뫼로 자리를 옮겼다.
군인들은 남산뫼에 오른 주민을 연령별로 분류한 뒤 다시 남산뫼 뒷편 완만한 곳으로 끌고 갔다. 매서운 중대장이
험상궂은 표정을 한채 소리쳤다.
"군경 가족 또는 국방경비대 가족들은 나오라"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한 청년이 증명을 보이며 대열 앞에 나섰다. 그는 호국군 소위로 복무 중 미쳐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 있어다고 밝혔다. 중대장은 그를 뒤돌아서게 하고 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그리고 중대장은
큰 소리로 "우리가 마을에 들어온 지 언젠데 나오지 않다가 이제 나오냐고" 화를 냈다
군인들은 45세 이상 어른과 10세 미만 아이들에게 간단한 가재도구를 챙겨 면 소재지로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10~15세 아이들에게 성냥을 주며, 집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17~45세 미만과, 가족과 떨어질 수 없던
몇몇 사람은 무리에 남게 되었다. 중대장은 이들에게 명당자리를 잡아주겠다며, 남산뫼 움푹 팬 곳으로 이동
했다. 비탈에 들어서니 덩그러니 놓인 무덤 위에 기관총 3자 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엎드리라고 한 뒤 총격이 가해졌다. 한차례 사격이 끝난 뒤 중대장이 나섰다.
"산사람은 하늘이 돌봤으니 살려주겠다. 일어나라"
그 말을 듣고 50여 명이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하지만 2차 총격이 가해졌다. 결국 일어 섰던 사람들은 죽었다.
"이번에 진짜 살려주겠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중대장은 "정말 진짜 살려주겠다" 재차 약속했다. 그 말에 10여 명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마을에 가서 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마을을 향해 가는 그들 등에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했다.
이 곳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용천사를 중심으로 한 산책로 입니다. 쉬엄 쉬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꽃무릇을 감상할 수 있는데 지금은 철이 아니라서 꽃무릇이 없습니다.
중간쭘에는 이런 흔들흔들 구름 다리도 있고요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쉼터들이 있습니다.
물레방았간도 있답니다. 지금은 물이 없어서 정지중이네요.
[용천사]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모악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산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600년(백제무왕1) 행은(幸恩)이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대웅전 아래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해한다
이 샘은 황해로 통하여 용이 살다가 승천햇다는 전설이 전한다. 645년(의자왕 5) 각진(覺眞)이 중수하고, 1275년
(고려 충렬왕1) 국사 각적(覺積)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와 명조때 중수하여 큰 절로 성장하였다.
6.25 전쟁때 모두 불타버린것을, 1964년 금당이 옛 보광전 자리에 대웅전을 세우고 199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하여, 꽃무릇철에는 절 입구까지 차량으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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