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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구간은 보부상길이며, 봇집을 메고 춘양역까지 생계를 위해 넘어 다녔던 삶의 고단함을 담고 있는 길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보부상길은 3개의 기차역을 지난다. 관광지로 탈바꿈을 시작하는 분천역을 시작으로 춘양면 소재지 까지의 여정이다.

2015-07-25 외씨버선길(분천-소천).gpx



"억지춘양"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영동선상의 기차역이다. "억지춘양" 이라고 하면 춘향전의 춘향이를 생각하지만, 사실은 춘양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선로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춘양면을 한바퀴 휘감아 도는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선계획에 춘양면을 지날 계획이 없었는데 정치인의 요구로 억지로 지금의 모습으로 변경되어 춘양역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기차역과 선로를 억지로 만들었다 하여 "억지춘양" 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봉화 한수정은 춘양면 면소재지인 의양리 134번지 에 위치해 있다. 원래 이자리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권벌 선생이 세운 거연헌이 있었는데 이 건물이 소실되고 그의 2대손인 권래가 1608년에 건물을 세우고 정자의 이름을 한수정이라고 하였다. 한수정이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하는 정자라란 뜻에서 붙였다 한다.


조선 말기의 문신인 만산 강용(姜鎔, 1846∼1934) 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건립하였다 한다. 정면 11간의 긴 행랑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서쪽에 사랑채와 안채가 연접하여 口字(구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고, 좌측에 서당을,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돌리고 별당을 배치하여 사대부집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간은 정면을 피하고 측면에서 Z형으로 꺾어져 들어가도록 하여 사대부집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랑채의 전면에는 晩山(만산)이라 쓴 대원군의 친필편액이 걸려 있다. 만산 선생은 영릉참봉(英陵參奉),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도산서원장 등을 지냈으나 1905년 이후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국운 회복의 기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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