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여행

2014-06-20[일반여행]해미 여행

분도 2014. 6. 2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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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방문한 해미읍 건물의 크기가 보통의 건물 크기보다 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

선조12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내포지방의 천주교 박해 때 1,000여명의 신도를 이곳에서 처형하게 됐다. 그때 박해와 관련한 회화나무(호야나무), 자리갯돌, 여숫골 등이 순교성지로 해마다 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 도보객을 위해 읍성 성곽과 소나무 정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걸을 수 있으며 주말 전통문화공연 등으로 문화예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또한 회화나무(호야나무), 동헌, 옥사 등 현존하는 역사 자료로 조선시대부터 근대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진남문 전경, 안쪽 에는황명홍치4년 신해조라는 글자가 새겨있는데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시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성종22년)에 진남문이 중수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교황방문을 알리는 플래카드

사적 제116호.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청허정(淸虛亭) : 청허(淸虛)라는 뜻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 라는 뜻이다. 청허정은 해미읍성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이곳에 올라서면 천수만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사 시회(詩會)를 하거나 문인들이 시를 읊었던곳이다.

해미읍성 시설 중 하나인 청허정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는데, 성현(虛白堂 成俔 1439~1505)이 지은「靑虛亭記」에 그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청허정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가 송종 22년에 세운 정자다

당시 충청도병마절도사영(해미읍성)을 들럿다가 간 문인들이 가면서 남긴 시들이 남아있다.

조위(梅溪 曺偉 1454~1503)가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손(李蓀)에게 올린 청허정이란 시가 있고, 절도사와 수령이 복무를 마치고 함께 청허정에 모여 지은 「청허정연회도(淸虛停燕會圖), 이경전(李慶全 1567~1644)이 지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1872년 고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故地)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고지도 작성 이전에 청허정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는 청허정자리에 신사를 만들어 친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현채 청허정은 과거 관련기록을 근거로 2011년 개축하였다.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이곳 해미 생매장터에서 발굴하여 1935년 4월 2일 서산 상흥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묘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원위치에 옮겨 모시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굑장 주교 경갑룡 요셉

"예수마리아" 기도 소리가 구경하던 외인들에게는"여수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숫골"불리고있다.

해미 시장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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