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산행/강원도

2010-01-01 [국내산행] 태백산,청령포,박달재

분도 2010. 1. 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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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사 매표소-유일사-장군봉-천제단-부쇠봉-문수봉-소문수봉-당골-당골 주차장

높이 1,566.7m. 태백산맥의 종주(宗主)이 자 모산(母山)이다. 함경남도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에서 비롯한

태백산맥이 금강산·설악산·오대산·두타산(頭陀山) 등을 거쳐 이곳에서 힘껏 솟구쳤으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소백산맥이

분기된다.

태백산은 북쪽에 함백산(咸白山, 1,573m), 서쪽에 장산(壯山, 1,409m), 남서쪽에 구운산(九雲山, 1,346m), 동남쪽에 청옥산

(靑玉山, 1,277m), 동쪽에 연화봉(蓮花峰, 1,053m)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이 산은

1,560m의 고봉 군(高峰群)이지만 산세는 험하지 않다.

북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고 산정 부근에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서남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태백 산지는 함백산과 함께 지질구조가 복잡하며 남한 제일의 탄전지대를 이룬다. 대한석탄공사의 장성탄광을 비롯하여 황지

일대에 많은 탄광이 개발됨으로써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지역이 대표적인 광산도시인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태백산은 천년 병화(千年兵火)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이며, 단종이 악령(嶽靈)이 되었다 하여 단종의 넋을 위무하기 위한

단종비가 망경대(望鏡臺)에 있다. 또한 이 산에는 태백 삼사(太白山祠)라는 사당이 있었고, 소도동에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1989년에 이 일대는 태백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태백산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오른다. 날씨가 얼마나 춥고, 바람이 쎄던지.. 가지고 갔던 소주가 얼었다.


날씨가 추워도 사람들이 발 디딜틈이 없다.

 

 2010년 1월 1일 첫해의 해가 드디어 떠 올랐습니다.


일출을 보고 문수봉으로 향했다. 바위돌이 많아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태백산 눈꽃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김삿간 유적지입니다 김삿갓 묘역앞의 섭다리

김삿갓 묘 전경


 

천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돌다 보니

남은 돈 엽전 일곱 푼이 아직도 많은 것이니

그래도 너만은 주머니 속 깊이 간직하려 했건만

황혼에 술집 앞을 이르니 어이 할꺼나.​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입니다.

조선왕조의 제6대 임금인 단종이 1457년(세조1년)에 노산군(魯山君)으로 찾추어져 처음으로

유배(流配)되었던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다. 단종은 1457년 6월 부터

두달동안 이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현(觀風軒)으로 옮겨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1726년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1763년

(영조39) 9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詩遺址碑)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앞에 보이는 곳이 청령포이다. 원래는 배를 타고 가야 하나. 이날은 강물이 얼어서 걸어서 들어 갔다.

청령포 안의 소나무들입니다.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ㅈ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

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소 담장안에는 단종유지비각((端宗遺址碑閣)이 있다.​

 

금표비

금표비는 단종 께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년)에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숭정구십구녕』이라 음각 되어 있는데, 이 뜻은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흑이 쌓여 생기는 곳도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 99년 이라는 내용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박달재는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느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도 부른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 도령이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 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 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 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하였다. 낙방한 박달 도령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가 지쳐, 3일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고개 쪽으로 달려가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 그 이후로 이 고개를 박달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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