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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흐드러진 너릿재 옛길을 걷고 싶었으나 이리저리 시간이 맞지 않아서 이제야 시간을 내어 가보려고 합니다. 광주에서 너릿재 옛길을 가려면 학동시장 정류장에서 화순 방향으로 가는 15X번 시내버스를 타고 너릿재 터널을 막 지난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소아르 갤러리에서 하차한다.. 




'너릿재’ 지명의 유래는 1757년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도로편에 北距光州界板峙距路九里(북거광주계판치거로구리)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 출간된 읍지에는 ‘판치(板峙)’ 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개를 오르내리는 비탈길이 좁고 험하지만 정상부는 비교적 넓고 평탄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판.즉, 널에 너릿재는 화순의 진산인 만연산과 안양산을 거쳐 무등산을 잇는 백두대간 호남정맥의 지맥을 따라 형성돼 있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깊고 험한 너릿재를 넘던 사람들이 산적이나 도둑들에게 죽임을 당해  너릿너릿 내려온다고 해서 너릿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너릿재는 광주광역시 동구 선교동과 전라남도 화순읍 이십곡리 사이에 있는 해발 240m의 고개로 광주와 화순읍내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보다 넓게 보면 광주와 전남동부지역을 잇는 고개였다. 




너릿재가 중요한 교통로였던 만큼, 광주에서 너릿재에 이르는 길에는 원지실골, 원골등 “원”이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이는 과거에 원(院)과 주막이 많았던 흔적이 있다. 




6·25전쟁 때에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 경비 초소 주둔지인 ‘너릿재고지’가 있었으며 원래 소로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로 바뀌었고 1971년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광주와 화순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고 숱한 애환과 역사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고갯길이다. 




대한제국시절 능주 출신의 양회일이 이끄는 의병대도 화순 읍내를 점령하고 광주를 공략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으려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 1894년과 95년 사이 겨울에 동학 농민군이 너릿재 동쪽 화순 이십곡리 입구에서 집단학살 당했고 1947년 여름에는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광주시내로 진출하려다 미군과 경찰에게 저지당하며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1946년에는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쏟아진 총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6·25 당시에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 체포된 일부가 이 고개를 넘었으며, 70여일 뒤 반동이란 이름으로 광주형무소에 갇혔던 많은 사람들이 또 이 곳을 넘었다.

5·18민주화운동때는 너릿재로 향하던 트럭에게 터널을 막고 있던 계엄군의 총질이 가해지고, 영문도 모른 채 30여명의 민간인들이 총성과 유혈이 범벅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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