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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교-토끼등-봉황대사거리-백운암터-중머리재-중봉-목교-서석대-장불재-규봉암-꼬막재-산장

높이 1,187m.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능선을 따라 천왕봉·지왕봉·인왕봉·안양산 등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며, 주위에는 신성봉·수래바위산·지장산 등이 있다.

산의 북부에는 중생대에 관입한 화강암, 남부에는 신라층군 퇴적암이 분포하며, 산정 부근의 암석노출지를 제외하면 산 전체가 완경사의 토산을 이루고 있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계류들이 동복호로 흘러든다. 산기슭에는 약 900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산정부의 백마능선 일대는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구릉지에서 재배되는 수박과 차는 그 맛과 품질이 뛰어나며, 특히 차나무 재배단지에서는 춘설이라는 녹차와 홍차 등이 생산된다.

봄 철쭉, 여름 계곡,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의 사철경관과 다양한 형태의 기암괴석 등이 절경을 이루고 증심사를 비롯한 많은 절과 유적 등 명승고적이 많아 1972년 5월 산 일대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30.23㎢로 기둥 모양의 바위가 많아 암석병풍·암석원 등의 명소가 많다. 산의 남서쪽에는 넓은 고산초원지대를 이루는 장불재가 있으며, 동쪽 사면에는 선돌이라 불리는 서석대·입석대·광석대 등의 3대 석경과 풍혈대 등이 있다.

입석대는 대표적인 경승지로 10~15m의 돌기둥이 여러 모양으로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다. 광석대는 산정에서 남동쪽 1㎞ 거리에 있으며, 규봉 등이 아름답다. 또한 산중턱에 있는 지공 터널은 큰 돌들이 약 2㎞에 걸쳐 있다. 원효계곡은 북서쪽에 위치하며, 소나무숲, 폭포, 깊은 웅덩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원효사가 있다. 용추계곡은 남쪽 기슭에 있으며, 증심계곡이라고도 한다.

울창한 활엽수림과 계곡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다우며, 특히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좋다. 계곡 내에 있는 증심사는 806년에 철감선사가 창건했으며, 경내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오백나한전·3층석탑·5층석탑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주변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이 있는 약사암을 비롯해 백운·천문사 등이 있다. 충효동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와 취가정이 있다. 그밖에도 송강 정철이 자랐던 환벽담과 식영정·성산별곡비 등이 있다.

무등산장-꼬막재-규봉암-장불재-중머리재-증심사, 바람재-천제단-중머리재-용추폭포-교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어 많은 등반객이 찾아든다. 7월에 광주광역시 민속대전, 10월에 무등문화제, 가을의 무등산갈대제 등의 민속축제가 열리며, 주변에 광주호·국립광주박물관·담양호 등의 명소가 있다. 호텔을 비롯한 각종 숙박시설과 위락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광주에서 증심사와 원효계곡으로 연결되는 시내버스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집에서 가까운 무등산을 찾았습니다. 토끼등 쪽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봉황대는 토끼등과 중머리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46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황대에서 200m 떨어진 천제단에서 제사를 모시며 이곳에서는 봉화를 올렸기 때문에 원래는 봉화대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부르기 좋은 이름으로 봉황대로 불리어지고 있다.

옛날에 광주 목사골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오씨 성을 가진 선비가 딸과 함께  살아 남았는데, 전염병 때문에 파탄이 난 가정을 복구하기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딸은 살림을 더욱 알차게 꾸렸나갔습니다. 그 결과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3개월 후에 광주목사로 부임하라는 임금의 교지를 받았습니다. 이 말이 동네에 전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딸에게 '네 아버지가 부임하면 그날 죽는다고 포기하라' 하였답니다.

그러자 그 선비는 '지엄한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수 없다', 하자 동네 사람을은 다시 딸에게 '그러면 무등산 염불암 부처님께 아버지의 무탈을 빌어라'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딸은 염불암 부처님께 '부처님 제 아버지가 부임하는날 무탈하게 하여주십시요' 라고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빌고 있었는데, 꿈에 하늘에서 관음보살님이 흰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또 한 손에는 호로병을 들고, 두꺼비 한마리를 꺼내 주면서 '부임하는 날 두꺼비를 가지고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구석에 놓아 두어라' 라고 하였읍니다.

딸은 관음보살님의 말처럼 두꺼비를 방구석에 놓아 두었더니 선비는 무탈하게 부임 하게 되고 딸은 세자빈 교지를 받았습니다. 세자빈이 된 딸은 염불암 중창에 공양하고 벽에 관음보살님이 흰 구름을 타고와 한손에는 연꽃을 또 한손에는 호로병을 들고, 두꺼비를 내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로 염불암을 '흰 구름의 벽화가 있는 암자' 백운암이라고 고쳐 불리어졌답니다.

이 백운암은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답니다.

중머리재에서 가파르게 중봉을 오른다. 

해발 915m 중봉 표시석


중봉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무등산 서석대는 8500마년전 전에 형성된 주상절리(돌기둥)이며, 병풍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녁 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 이라 전한다.

1187m인 무등산 정상은 지금은 군사지역으로 출입금지구역입니다.

정상에서 장불재로 하산길에 있는 승천암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서 스님이 저녁 때 부얶에서 군불을 때고 있는데 큰 어미 산양이 급히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었다. 무었에 쫒기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나무청에 자리를 보아 그 곳에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산양은 세마리의 새끼를 순산하고 일주쯤후 산양은 암자를 떠났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무엇이 스님의 가슴을 조이고 있어 스님은 잠을 깨었다. '너는 내가 3년전에 먹이를 먹으려는데 방해를 하였다 수백 마리의 산양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그 어미 산양만 먹이로 취하였으면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너를 먹이로 하여야겠다. 네가 살려면 종각에 매달린 종을 세번 울려라. 내가 승천할 시각에 종소리를 들어야 승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 배속으로 들어가 내가 승천하는데 힘이 되 주어야 한다.', '나를 풀어주라 그러면 종을 치겠다.' '네가 도망가기 때문에 풀어 줄 수 없다',

이런 말이 오고가고 할 때 갑자기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이무기는 사르르 스님을 풀면서 사라졌다. 날이 밝자 스님은 신기하여 종각에 가 보았다. 산양 세마리가 뿔이 부러지고 이마가 깨어져 죽어 있었다. 이 산양 세마리는 어미 산양으로 부터 스님의 덕으로 죽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산양들은 항상 암자 주위를 돌면서 혹시 스님께서 무슨 일이 생길까 돌아 보는중 이무기가 스님을 헤지려 하자 종을쳐 스님을 구하였다.

입석대


시무지기 폭포 입구입니다.

무등산.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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