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2014-08-29[일반여행]수원화성, 행궁

category 일반여행 2014. 8. 29. 20:12

▲ 수원 화성지도

▲ 팔달문(八達門)은 보물 제402호(1964. 9. 3)이며,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팔달문에서 화성으로 오르는 입구(매표소)

▲ 남치(南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남치는 팔달문과 남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 남포루(南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7월 9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를 수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 서남각루(西南角樓) 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甬道)의 남쪽 끝에 세워졌다. 1796년(정조 20) 4월 16일 공사를 시작하여 7월 20일 완성하였다. 편액에는 화양루(華陽樓)라고 쓰여져 있는데 ‘화’자는 화성을 뜻하고 ‘양’자는 산의 남쪽을 뜻하는 것이다. 


▲ 서포루(西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 5월 30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서노대(西弩臺)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 화성행궁은 사적 제478호이며,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 서북각루(西北角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서문(華西門)은 보물 제403호(1964.9.3)이며,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보물 제1710호(2011.3.3)이다.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북동적대(北東敵臺) 적대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한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어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뒤돌아 본 장안문


북동포루(北東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4년(정조 18) 9월 2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東北角樓, 訪華隨柳亭) 보물 제1709호(2011.3.3)이며,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북암문(北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의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은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 20) 3월 27일 완공되었다. 


동장대, 연무대(東將臺, 鍊武臺)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