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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4[일반여행]영주 부석사

category 일반여행 2013. 10. 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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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영주에 가는 기회가 왔다. 영주 하면 생각 나는게 영주 부석사였다. 초등학교부터 들었던 무수히 들었던 절 이름 아닌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부석사 가는 길에 들어서니 좌우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나를 반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 소백산맥 줄기인 봉황산 중턱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펼친 최초의 가람이다. 신라 통일기의 사상을 주도한 의상은 새롭게 화엄학을 펼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의상과 그 후예들은 신라 각지에 화엄도량을 건립하였는데, 후대 역사가들은 그들 가운데 여러 곳을 추려서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불렀다. 부석사는 화엄십찰 가운데 제1의 가람이다.

부석사를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징은 90도 각도로 들어 개폐가 가능한 독특한 창문입니다. 창틀에 나무를 받혀 고정을 시키면 햇빛도 가리고 바람도 쉽게 드나들게 하기 위함이죠.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에 세워져 1962년에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불전입니다. 그리고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더 높인 귀솟음, 유연한 귀마루 등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배흘림 기둥은 통나무 형태의 기둥이 아니라 타원형 같이 중간 부분이 볼록한 형태의 기둥을 말한다. 배흘림 기둥의 특징은 구조상의 안정과 기둥의 가운데가 더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줄이기 위함이다.

목조로 건축된 무량수전의 정면 가운데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썻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석사 부석은 신라 문무왕1(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룬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령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 윗 바위 사이에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리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

부석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며,

부석사 안양루도 누하진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누하진입(樓下進入)은 누마루 아래 좁은 통로를 힘겹게 올라간 후 대장관이나 마당을 보여주는 수법을 말한다

부석사 삼층 석탑은 1963121일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26m, 기단(基壇) 너비 3.56m이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국보 18)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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