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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8 문경새재길.gpx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을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문경새재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 초기 새재 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후삼국 역사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설화들이 남겨진 이곳은 우리 땅에 국가가 형성된 이후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문경과 괴산, 충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개통된 지금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옛 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흥천사는 신라 선덕여왕 11(643)에 창건된 신라불교 전승사찰로서 원효대사가 100일간 수도 정진하였으며 나옹선사가 기도중 참선곡을 지었고, 그 유명한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네오도송이 이곳 흥천사에서 지어졌다. 들려보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문경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풀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로 했다는 설과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문경새재는 광광지로 개발하면서 옛길은 크게 넓혀졌다.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오솔길이 보인다.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중요한 통로였고,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타고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로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는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3관문인 조령관은 새재 정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위해 선조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때 중창한 3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문루는 1907년 불타없어진 것을 1976년에 복원 하였다.

조령약수는 해발 643m에서 솟아나는 춘하추동 수온이 일정한 백수영천이다.

관문을 잇는 새재길은 더 이상 산속의 오솔길이 아니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폭 5m의 흙길로 단장됬다.

2관문은 조곡관이라고도 부르며 세관문중 맨처음 설치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기록에 보면 신라때 기와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맨처음으로 생긴 것은 아니라고 보는이도 있다.

산불됴심비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한글로 새겨져 있다.

용담폭포비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비

1관문 주흘관은 1708년에 세워졌으며, 세 관문 가운데 제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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