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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도보여행] 마곡사

category 도보여행/충청도 2010. 1. 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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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이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하여 「택리지」「정감록」등

의 여러 비기에서는 ​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9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 받은

전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이저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마)와 같이 무성

했다 하여 마자를 넣어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때 스승인 마곡보철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 곳에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것을

1172년(명종2)에 보조국사 지눌이 제자 수우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몸을 날려

신술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들에게 달려 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 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 받아서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왤란 때 대부분 불타 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 (효종2)

에 각순이 대웅전과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수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 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이요 법명은

원종이다' 라고 쓴 푯말이 꽃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과 매화당 등이 있으며ㅕ, 그 밖에도 염화당, 연화당등 숭려가 거처하는 요사체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

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 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라교를 사이에 두구 보물 제801호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과 보물 800호인 공주 마곡

사 영산전, 보물802호로서 천장의 무늬가 아픔다운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강당으로 사용되는 흥성루, 해탈

문, 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체인 심검당이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곡사를 둘러본 후 태화산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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