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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일반여행] 강릉여행

category 일반여행 2012. 6. 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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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위대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율곡이다. 조선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던 정여립을 천거했고 위대한 인본주의자였던 율곡 이이는 강릉시 죽헌동에 자리한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그런 연유로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은 현룡(玄龍)이라 하였으면 산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강릉 시외버스터미널

강릉터미널에서 무작정 가다다보니. 경포호수 가는길이다.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 관련하여 유명해진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조선초기의 건축물로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城柌),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 기념관, 강릉 시립박물관등이 있다.


見得思義(견득사의) -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오죽헌 

배롱나무 율곡 이이 당시에도 있었던 나무로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율곡송(栗谷松)

율곡매(栗谷梅)는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1400년경에 조선시대 조선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고,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한다. 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이라 지을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 되었다.

어제각(御製閣) 율곡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한다음 벼루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채찬(金載瓚)이 이를 보관 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어제각 벼루

구 오천원권 도안이 된 풍경

오천원권 촬영지점

신사임당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 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任師霽)라고 칭하기도 했다. 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이 인선(仁善)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없다. 아버지는 영월군수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세조때의 원종공신 이유악의 손자인 이사온의 외동딸 용인 이씨이다. 사헌부 감찰등을 지낸 이원수와 결혼하여 이선 이번 이이 이우의 네 아들을 두었고 그리고 네 딸을 두었으나 맏딸이 매창이란 호를 사용한 기록만 남았다.

강릉 바우길 리본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때를 쫒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후, 그 후손이 집금도 살고 있다, 총건평 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등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환벽한 구조를 보여준다.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 하며, 여기에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권의 책, 글 그림등이 소장되어 있다.

배다리 마을은 운정동 경포에 있던 다리로, 예전에는 경포호가 넓어서 마을에서 호수 동쪽에 있는 초당이나 강문으로 다닐 때 배를 타고 다녔다. 이때 배를 타거나 내릴 때 편하게 하도록 다리가 있었는데 이후 다리이름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김시습 관련 유물 자료를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와 소설에 담긴 김시습의 고매한 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경포 도립공원 내에 전통 한옥의 형태로 만들어 졌다.

해운정은 1530년 어촌 심언광(沈彦光)선생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것이라 전한다. 정자의 편익인 해운정(海雲亭)은 송시열이 쓴 것이고, 기문은 권진응이 지은 것이며 이외에도 율곡등 여러 명사들의 시문판이 보관되고 있다. 해운정의 전체적인 형식은 양반가옥의 틀을 따르고 있으나 고망의 구성, 마루의 형식 등은 민가형식의 표현이 짙게 배어 있다. 강릉지방에는 별당형 정자 건축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해운정은 조선 상류가옥의 별당형식의 정자건축에 속하는 목조 건물로서, 강릉지방에서는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축물이다.

강릉 3.1만세 운동 기념탑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1326) 당시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숙(朴淑)이 현 방해정 뒤산 인월사 옛터에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현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수 없다. 현위치로 옮겨 지은 후 여라차례 고쳐지었고, 1873년에 부사 이직현이 다시 세운 뒤 193419471962년에 보수 하였다.

경포호수와 주위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장소에 지어진 이 건물은 정면 다섯칸, 측면 5칸 규모인 단층 겹처마 팔장지붕으로 익공 양식에 2고주 7량가구이며 연등 천장으로 되어있다.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위치에 맞추어 높낮이를 설정하고 다양한 행사에 따라 공간을 나누며, 시각의 연속성이 요구되는 곳엔 적절한 공간 형태를 부여한 좋은 예라고 볼수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은 '녹두일출(綠荳日出)'은 호수 남쪽 해안의 녹두정[지금의 한송정 터]에서 보는 일출이다. '죽도명월(竹島明月)'은 호수 동쪽에 솟아 있는 산죽이 무성한 죽도에서의 달맞이 광경이다. ''강문어화(江門漁火)는 강문 입구에 고기배의 불빛이 바다와 호수에 비치는 아름다운 밤의 모습이다. '초당취연(草堂炊煙)'은 초당마을 저녁 무렵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다. '홍장야우(紅粧夜雨)'는 경포호 북안(北岸)에 있는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로 홍장의 전설이 얽힌 장소의 정경이다. '증봉낙조(甑峰落照)'는 호수 서북쪽 시루봉 일몰의 낙조 풍경이며 해질녘의 구름 사이로 저녁 노을이 반영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환선취적(喚仙吹笛)'은 시루봉 신선이 바둑을 두고 피리를 부는 신선경이다. '한송모종(寒松暮鍾)'은 호수 남동쪽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이다.

참소리축음기 박물관은 손성목 관장이 40여년간 60여개국에서 축음기를 모아 1992년에 문을 연 세계 최대 규모의 오디오 박물관입니다. 17개국에서 만든 축음기 4,000여점 가운데 1,400여점의 축음기와 음반 150,000장 그리고 8,000여점의 음악관련 도서 자료들이 진열되어있어, 100년의 소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디슨 박물관 보다 예디슨이 만든 축음기 진품들이 더 많이 진열되어있다.

덤으로 진열된 각국의 오랜된 자동차들

이곳에 전시된 기기들은 생생한 음악을 들을 수 잇는 것이 98%나 되며 아메리칸 포노 그래프(전세계 6대중 유이하게 현존)와 같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기기도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베어드 30라인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인 유성기 1(탄호일:1877)부터 오늘날의 오디오까지 세계 오디오의 발전 모습을 볼 수 있다.


홍장암 전설은 고려말 강원도 안찰사 박신은 강릉지역을 순찰하던 중 강릉기생 홍장을 만나 서로 사랑하여 정이 깊게들었다. 박신이 다른 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와 홍장을 찾았으나 강릉부사 조운흘이 놀려줄 생각으로 홍장이 밤낮으로 그대를 생각하다 죽었다고하자 며치을 몸져 눕게 되었다. 이에 측은하게 생각한 조부사가 혹시 경포대에 달이 뜨면 선녀들이 내려오니 홍장도 배를 타고 올지 모른다고하며 호수로 데려갔다. 신비스런 운무속에 홍장이 나타나게 하여 극적인 재회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경포호 안에 있는 새바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1958년 동갑계원들이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새바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이 없이 지붕만 만들었다. 방위에는 조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서 써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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