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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난곳이 나주시 문평면 죽곡부락 또는 대실마을이리고도 부릅니다 .

일자:2009년 10월 25일

코스 : 백동마을~정도전선생 유배지~봉학마을~신경마을~금당마을~승일농원~오륜마을(나대용장군 생가)~봉강사

        서원마을~국동삼거리~801국도~백동마을 원점회기

아래 사진은 천천히걷는 사람들의 즐거움 카페에서 흰머리소년(오홍근)님의 작품임을 밝힘니다

다시면 백동마을회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노송을, 마을앞의 나무를 심는 이유는 마을의 화에서 막어준다는 믿음에서나왔습니다.

 

삼봉 정도전의 소재동기 

소재동(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은 여말선초의 혁명적 정치가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이다. 그는 이 곳

에 와서 풀도 베지 않고 나무도 깎지않은 채 흙을 쌓아 마당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듥고

두 칸 초가집을 짓고 3년을 지냈다. 일찍이 시인 두보는 청두에 있을 때 초당을 짓고 산 것이 겨우

한 해를 지냈을 뿐인데 그 이름은 천년을 전한다. 삼봉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을 떠나면 이 초사는

비바람을 맞고 들불에 타서 썩어 흙덩어리가 되어 후세에 과연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를 일이라 하였다.

신 소재동기를 적은 도올은 말한다. 삼봉의 초사는 두지미의 초당보다 더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소재동에 있는 정도전의 살았던 초막 

소재동비


 

[나대용 생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 26호, 체암 나대용은 임진왜란때 이순신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저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공로자이다. 1556년(명종11)에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선조16) 훈련원 별시무과에 응시

, 병과로 합격하였다.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동에서 10여년간 거북선 설계도와 제작과정을

연구한 후 마을 앞 방죽골에서 첫 시험을 끝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전인 전라수군절도

사 이순신을 찾아가서 거북선 제작을 협의하여 귀중한 자룔로 인정 받았으며 그 후 임란이 일어 나자

거북선 3쌍을 처음으로 진수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공전서』,『난중일기』,『나주읍지』,

『호남동순록』,『조선왕조실록』등에서 뒷바침하고 있다.

생가의 대지는 뒷면이 죽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맞담과 생울타리로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본채는 나남서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1칸 규모에 건물의 전후좌우에 퇴칸을 가진 -

자 집인데 본채만 남아 있다. 평면구성은 좌측에 부엌과 부엌방이 상하 복렬로 배치된 겹집이다. 툇마루

는 전퇴와 우퇴에 부분적으로 설치되어 있고 안방문 위에는 경모당이라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보채는 막돌 허튼층 쌓기를 한 50cm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

나무 뼈대에 흙을 바르고 강회로 마감한 심벽구조의 벽체를 사용하였다. 용자창과 디살창을 혼용하

였으며, 대청과 부엌은 판장문을 달았다, 방에서는 반자를 두어 천장을 만들었고 부엌과 대청은 서까레

를 노출하고 강화로 마감한 연등 천장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홑처마를 사용한 초가우진각 건물이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봉강사]송와​ 나문규를 모시는 사당​

봉강사는 오룡리 오륜동 마을에 있다. 원래 1812년(순조12)경 고려시대 때 서해도 안념사를 지낸 송와

나문규와 죽헌 나계종을 춘추로 모시기 위해 금성 나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훼철

때 헐렸다가 1924년에 복원하였다.

* 송와 나문규

송와 나문규(1312~1355)는 오륜촌에서 태어나 충혜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명경박사를 거쳐 공민왕때

서해 안렴사를 지냈다. 죽헌 나계종(1339~1415)은 공양왕때 예문관제학을 지냈고 나주에 귀향하여

석간동에 초가를 짓고 주위에 송죽을 심어 호를 죽헌이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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