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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화왕산.gpx

경상남도 중북부 산악지대에 있으며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는 창녕의 진산이다. 옛날 이 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불뫼·큰불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하류지역에 솟아 있어 실제보다 우뚝하게 보인다. 억새밭과 진달래 군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5만여 평의 억새밭이 펼쳐져 있어 3년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정상 일대의 억새밭에서 억새태우기 축제가 열렸으나, 2009년 인명사고가 발생하여 폐지되었다. 매년 10월 초에는 화왕산 갈대제가 열린다. 억새는 습지에 사는 갈대와 구분되는 것으로 이 산의 정상에 서식하는 식생은 억새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억새를 갈대로 불러왔던 지역의 전통에 따라 10월에 열리는 행사는 여전히 갈대제로 불리고 있다.

창녕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지금의 냉장고 역할을 하는 인공적 구조물이다.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하는 인공적 구조물이다.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바깥면은 보온을 위하여 흙으로 두껍게 덮혀있기 때문이다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 지는데, 창녕 석빙고 역시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 구멍을 두었다. 바닥은 내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 올린 4개의 무지개 모양을 중간 중간에 두었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요철을 가진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 공기가 드나드는 것을 조절하여 냉기가 오래가게끔 만들었다. 창녕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申曙)에 의해 중수 되었다. 각부분의 양식 또한 잘 담겨져 있어 이렇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녕여고옆의 화왕산 들머리

화왕산 정상

정상에 있는 바위 절벽

화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창녕군

화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정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 약 2,700m, 현재 동문·서문·연못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해발 757m의 화왕산의 험준한 바위산을 등지고 남봉과의 사이에 넓은 안부를 둘러싼 웅장한 산성이다. 성벽은 앞뒷면을 다같이 모난 자연석과 가공석으로 단면 사다리꼴로 쌓았으며 동·서 두 곳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서문은 거의 허물어졌으나 동문은 너비 1m, 높이 1.5m 가량의 거석을 정연하게 쌓은 성문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편에는 창녕조씨 시조에 관한 전설이 전하는 작은 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왕산 허균 촬영지

창녕조씨득성비(昌寧曺氏得性碑) 창녕조씨가 이곳에 와서 성()을 얻었던 이야기가 새겨진 비

동문에서 남문터로 내려가는 길 잡초더미 사이에 분화구이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170기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30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원래는 한 고분군을 이루고 있었으나 국도가 나면서 교동·송현동 고분군이라 따로 불리고 있다 이 일대 고분군의 처음 모습은 물론 아니다. 금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고분 수가 많게는 170, 적어도 150기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 많던 옛 무덤이 자취 없이 사라지고 지금처럼 볼품없는 규모로 줄어든 것은 1910년대부터 시작된 도굴과 개간에 의한 농경지화, 자연의 황폐에 따른 평지화 등 때문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8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의 주도로 교동 고분군의 일부와 송현동 제89·91호분의 발굴이 이루어진 바 있는데, 이때 마차 20, 화차(貨車) 2()이 넘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보고서 한 장 간행되지 않았고, 출토 유물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다. 허가받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이런 발굴을 통해 많은 금은 세공품이 쏟아지자 도굴꾼들이 달려들었고, 수많은 고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비화가야는 그렇게 유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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