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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일 첫째날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터미널전북 정읍시 수정동 약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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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서해안 따라 걷기 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서울 광화문에서 전남 장흥 정남진까지 걷는 제8차 도보여행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첫 구간부터 참가 하고 싶었으나, 20159월 양구 대암산 산행 때 오른쪽 발목 골절 사고와 올해 2월에 뜻하지 않은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한 체력저하로 도보 진행에 방해가 될까봐 참가를 못하다가,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도보 출발지인 원평터미널은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 있으며 1973년 전라북도 김제시와 금산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하여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진입하는 도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비포장 도로였으나 2002년 포장도로로 바뀌면서 리모델링 공사까지 하였으나, 2010년부터 수익성이 매우 낮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공용터미널로서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원래 주택이 있었던 곳으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군들이 집결하였던 장소를 기념하는 동학 기념탑이 세워진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원평터미널에서 우측으로 돌아 10m도 못간 지점에 학수재 위령각이 있다. 이 위령각에서는 김덕명 장군과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와 이종희 장군의 넋을 기리기위한 곳이다. 김덕명 장군은 금산면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중진인물인 금구 대접주로 원평 구미란 전투를 주도 했으며 원평에 도소(都訴)를 설치 하는 등 동학농민 운동에서 주요활동을 했으며, 또한 이종희 장군은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여 항일 운동을 했으며 중국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금평로 좁은 도로를 따라간다. 길 양옆에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무성하고 간혹 개망초 꽃도 보인다. 논밭 옆에 심어 놓은 콩도 결실을 맺었으나 아직 수확하지 않고 있다. 용호리 들판에는 추석이 지났으나 수확하지 않은 벼들 위에 약한 가을 햇살이 내려 비추고 있다. 조금더 가니 통사마을이 나오며 1번 국도 아래를 통과하면 1번 국도를 왼쪽에 두며 국도 아래쪽을 걷고 있다

1번국도를 왼쪽에 두고 2.4진행하다 다시 국도 아래를 통과하여 다시 국도를 오른쪽에 두고 걸어간다. 1번 국도 경사면에는 칡넝쿨이 무성하다. 용호 교차로를 지나고, 김개남 장군묘역 8.1안내판이 보인다. 김개남(金開南, 1853915~18941213)은 조선말기의 한학자, 동학 종교인이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농민군 남접의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본명은 영주(永疇), 자는 기선(箕先),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개남(開南)이란 이름은 농민혁명과정에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뜻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라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여 영남의 서남부 까지 그 세를 떨쳤다. 일본군에 패하여 태인 너듸 마을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친구인 임병찬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보국안민을 전봉준과 달리 부패한 조선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한다. 지금의 장군의 묘는 시체가 없는 가묘이다.

정읍북로를 따라서 계속 간다. 국도 경사에는 가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감나무도 보인다. 주인도 있는 것 같은데 따지 않았다. 오성마을에 이르자 지하육교를 지나서 곧바로 면옥마을에서 다시 지하육교로 나온다. 이제 겨우 3남짓 걸었는데 힘이 든다. 입에서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난다. 선두가 내 마음 알아 차렸는지 롬멜가구라 쓰인 간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제법 넓은 공터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2남짓 걸어가니 태인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에는 피향정(披香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신라시대에 태산 군수를 지내던 최치원이 연못가를 거닐면서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앞에는 피향정(披香亭)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맨 처음 언제 창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현종때 현감 박승고가 중건한 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친 것이다. 정면5, 측면4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4면이 모두 트여 있고 빙 둘러서 난간이 쳐져있고 연등천장 이며 합각 밑에 작은 우물반자를 대었다. 보물 289호로 지정되었다.

피향정을 지나 한창 도로공사가 진행중인 태안면 소재지 도로를 요리조리 피해가는데.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좌측 골목으로 접어 들라는 연락이다. 골목길로 접어 드니 하연지다.

 

원래 피향정 앞뒤에 상연지와 하연지가 있었으나, 상연지는 메워져 길이 되고 지금은 하연지만 남아 있다. 연못으로 가려면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가 뒤로 돌아가야 한다.

피향정 옆에 늘어선 비석들 가운데 태인 현감 조규순의 선정비가 있다. 조규순은 갑오년 당시 악명 높았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아버지로 이 비는 조병갑이 고부 사람들에게서 돈을 걷어 세운 것이다.

 

피향지를 한바퀴 돌아 다시 정읍북로를 따라 걷는다. 면소재지를 조금 벗어나니 태인면 사무소가 보인다. ‘태인지명은 1409(태종9) 고려시대에 태산군(太山郡)과 인의현(仁義縣)을 합치면서 각각의 이름자를 딴 것에서 유래한다. 조선 후기에는 군()으로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으나 호남선 철도가 빗겨나감으로 지역 중심이 신태인으로 옮겨졌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중심지 김제평야,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 평야는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쉰지가 꽤 된 것 같다. 다리가 아파온다. 일행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 간다. 걸음걸이는 점점 늦어 진다.

태인면 사무소에서 500m 쯤 가니 만남의 광장 영조생모 숙빈최씨라 쓰인 돌비석이 보인다. 머리가 갸우뚱 거려진다. 만남의 광장이면 광장이지, 영조생모 숙빈최씨는 뭐지? 여기에는 설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전주감영에서 남도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 대각교에서 조선 숙종때 둔촌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아 쉬어가게 되었다. 여덟살 먹은 딸을 안은 동행도 동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옷은 남루하나 용모가 단아하고 총명하게 잘 생긴 어린 소녀가 앞은 지나가게 되었다. 

딸과 닮은데가 많아 소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물어보니 성은 최씨이며,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오래고 무의무탁한 천애고아였다. 이 소녀를 불쌍히 여겨 데리고가 글 공부와 예의 범절을 가르치며 친딸과 똑같이 기르니 예의 바르고 얼굴 곱고 총명하기가 이를바 없었다.

그 후 둔촌이 내직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이 소녀를 데리고 갔다. 딸이 왕비(인현왕후)로 간택 되었을 때 함께 임궁 하였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되고난 후 어느 날 궁궐을 야행하던 숙종이 밤 깊은 시각에 남몰래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려 놓고 만수무강을 비는 최씨를 발견하고 감동하여 후궁으로 삼았으며, 훗날 영조 임금의 생모가 되었다. 조선후기에 가설된 대각교는 일제 강점기에 개설된 국도1호선으로 폐교 되었다.

대각교를 지난 후 정읍배영농조합 집하장에서 지친몸을 쉰다.

 

국립종자원 전북지원 근처 성솔정이란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성솔정의 음식 깨끗하기는 하다.

 

 

 

 

 

 

 

 

 

 

 

 

 

 

八人會盟遺跡(팔인회맹유적) 선돌은 高興大(고흥대) 柳希津(유희진) 장군께서 司憲府(사헌부) 監察(감찰)奉職(봉직)1592(宣祖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바로 낙향하여 그해 725일 동생 希泗(희사), 希汶(희문) 당숙 春苾(춘필) 재종 景仁(경인) 成仁(성인) 克仁(극인) 재종질 ()과 함께 팔인이 義兵倡義(의병창의) 뜻을 품고 同心誓死(동심서사)會盟(회맹)하고 결의를 다지는 증표로 이 곳에 碑文(비문)이 없는 빗돌을 세우고 長城南門(장성남문) 義廳(의청)으로 입성하여 義兵(의병) 활동을 전개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 돌을 팔인 희맹 유적 돌선거리라 불러 오늘 날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 유서 깊은 선돌이다.

완만한 경사길을 힘들게 오르니 멀리 들판에서 마른풀을 태우는 연기가 저녁밥을 짓는 그것처럼 피워 오른다.

尤埯 受命 遺墟碑(송우암 수명 유허비)

조선후기 유학자 송시열(1607~1689)의 죽음을 기려, 그가 죽은 곳에 세운 것이다. 숙종15(1689)2월에 제주도로 귀양간 송시열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다시 끌려오던 도중 6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다음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져 숙종21년 정읍 하모리 모촌에 고암 서원을 새우고, 영조 7(1731)에는 그가 사약을 받았던 이 자리에 비를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25년에 군수 이동한(李東漢)이 다시 세운 것이다.

저녁을 먹었던곳 내부는 깨끗했으며 맛도 있었다.

2016 10 16일 둘째날 (전북 정읍시 수정동전북 순창군 복흥면 약 25)

 

다음날 숙소에서 일어나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숙소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둘째날 일정이 시작된다. 정읍시가지를 지나서 정읍천 정주교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행장을 다시 꾸리고, 정읍천 상류쪽으로 하천 바닥 도보로를 따라서 간다. 초신교, 정동교, 상동교를 지나 자전거 도로로 올라서니 장미터널이 나온다. 아직 장미터널의 장미는 어려서 터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정읍천 고수부지에 있는 보행자 도로는 올라서 자전거 도로와 합류하다가 다시 내려서기도 한다.

정읍천을 따라가는 길은 정읍 시립박물관까지 이어진다. 이제 칠봉산을 왼쪽에 오른쪽엔 내장산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포장된 도로를 조금 걷다보니. 내장저수지가 나온다. 아직 단풍철은 이른가 보다. 사람들이 그리 분비지 않는걸 보면, 내장호 야생화 동산을 지나니 내장산 단풍 생태공원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이제 빗방울도 제법 굵어졌다. 내장산 공용 터미널을 지나서 완만한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한다. 5정도 되는 경사길이다. 몇 굽이를 돌았을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산허리를 감고 있다. 그 아래는 걸었던 길이 아스라이 보인다. 힘은 들지만 아주 천천히 오른다

 

오르다 보니 내장산 단풍고개라 쓰인 바윗돌이 보인다. 신선봉 해발765m, 써래봉 해발620m, 단풍고개 해발 370m 라고 조그만 글씨로 조각했다. 이제 조금 가면 고개 정상인가 보다


단풍고개 정상에 도착해서 점심도 먹고 쉬었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한다. 빗줄기는 이제 폭우처럼 쏟아진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가 셋 길로 빠진다. 서지마을을 지나니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야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서 이른바 알바를 2.6정도 하였다. 다시 하천 제방을 따라 간다. 하천제방 공사로 인한 통행제한 안내판이 나온다. 파헤쳐진 공사지역을 통과 하다가. 주저 앉았다. 신도 젓고, 옷도 버리고 그래도 터벅 터벅 갈 수 밖에 없다. 49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반월리 용춘 가든에서 도보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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